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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DUART 연혁

1922년 뉴욕시에서 필름 현상소로 처음 문을 연 DuArt는 발전을 거듭해 지금의 방송 후반제작, 편집, 마무리, 장비 대여 서비스를 제공하는 후반제작(Post Production) 전문업체가 되었습니다.

고틀립과 영은 입찰에 성공해 주차장 건물 12층에 위치한 펜트하우스에 있는 필름 현상소를 획득했습니다. 하지만 필름 현상소의 현상용 탱크 선반대가 빠져있었습니다. 경매인에게 사기를 당한 것이죠. 그래도 고틀립과 영은 굴하지 않고 ‘DuArt Film Laboratory, Inc.’라는 신비로운 이름의 회사로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고틀립과 영은 세 번째 파트너로 잭 고츠(Jack Goetz)를 영입했고, 고츠는 DuArt Film Titling Service를 설립했습니다. 고츠의 인맥을 통해 DuArt는 Paramount, Loews, Universal과 쉴새없이 사업을 이어갔습니다.


고틀립과 영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가난했고 일에 분투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고틀립은 낭비를 즐겼던 반면 영은 회사의 기술 관리와 인사 관리를 전담하는 DuArt의 핵심인물이 되었습니다.


DuArt를 설립하기 전 영은 Erbograph Company 스튜디오와 현상소에서 인쇄원과 편집자로 잠시 일하며 영화가 막 동트던 시절의 태동 기술을 현장에서 섭렵했습니다. 영은 이 경험을 통해 화학물 혼합, 감광측정법, 현상, 노출, 필름 청소 및 복원, 인쇄를 넘나드는 폭넓은 지식을 다졌습니다.


영의 열정과 지식은 혁신을 불러왔으며, 혁신은 지금도 DuArt의 핵심 강점입니다. 초기에는 현상작업이 정신없이 복잡하고 많은 노동이 필요했으며 주로 수작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다가 1920년대 후반에 영과 DuArt가 최초의 35mm 필름 자동 현상기를 설계하고 제작해 현상 작업에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이 현상기는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때는 1922년. 당시 미국 대통령은 워런 하딩이었고, 뉴욕 라디오 방송국 WEAF는 세계 최초의 라디오 광고를 방송했고, 조지 이스트먼은 16mm 필름을 상용화하려는 참이었습니다. 한편 전 필름 현상 전문가 아서 고틀립(Arthur Gottlieb)과 젊은 필름 에디터 알 영(Al Young)을 주도로 한 사업 파트너들은 맨하탄 웨스트 55번가에 위치한 필름 현상소 경매에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영화에 색이 입혀지다

1950년대 초반에 이스트먼 코닥 (Eastman Kodak)이 컬러 필름을 도입하면서 고대하던 기회가 왔습니다. 영은 컬러야말로 필름 현상의 미래라는 걸 알아채고 컬러 현상소를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영은 코닥에 있던 젊은 기술자 존 스콧(John Scott)을 DuArt 엔지니어링 부사장으로 영입하고, 한편 영의 아들 어윈(Irwin)은 리하이(Lehigh) 대학에서 공학 학위를 취득한 뒤 다시 DuArt에 들어옵니다.


수석 기술자 프레드 베이(Fred Bay)와 폴 코프먼(Paul Kaufman)과 함께 DuArt는 최초의 컬러 네거티브-포지티브 현상기와 장면마다 색 조정이 가능한 프린터를 설계하고 제작할 수 있었습니다. 1950년대 중반이 되어 은퇴를 준비하게 된 영은 그의 아들 어윈, 오랫동안 함께 해 온 직원 코프먼, 새로 임명된 사업 본부장 밥 스미스(Bob Smith)에게 DuArt의 일일 운영을 맡깁니다.

영화에 소리가 입혀지다

무성영화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영과 기술자들은 영화계에 새로 도래하는 시대에 부응하기 위해 밀착기를 위한 음향 모듈을 디자인하고 제조했습니다. 창립 후 10년 즈음 대공황이 밀어닥쳤음에도 DuArt는 영화 업계로부터 계속 작업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혁신은 기술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1930년대 초반 DuArt는 고틀립의 인맥의 힘을 빌어 당시 인기였던 메디슨 스퀘어 가든 권투시합의 영상 제작을 맡을 수 있었습니다. 숨가쁜 속도를 요하던 이 작업은 훗날 등장한 뉴스 영상의 신속 제작 기법을 앞질렀던 것입니다.


현상소는 주로 거물 스튜디오를 상대로 사업을 했습니다. 이에 따라 영은 큰 스튜디오와의 사업이 잘 풀리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1930년도 후반에 “Movie Sweepstakes”라는 제작 사업도 시작했습니다. 영화관에 상영될 경마 경기 애니메이션 예고편을 제작했습니다. 이후 1938년에 “The Fight for Peace”라는 전쟁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는데, 이 영상으로 인해 영과 DuArt는 좋지 않은 평판을 받고 맙니다.


전쟁이 끝난 후 고틀립, 영, 고츠는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고틀립이 이끄는 현상소에 두 번째 합작 투자를 합니다. 허나 전쟁의 여파가 한창이던 시절이었던지라 사업이 실패하고 맙니다. 이로 인해 고츠는 DuArt를 떠나고 Title Department는 경쟁 업체가 됩니다. 고틀립은 자신의 DuArt 지분을 영한테 매각한 후 DuArt가 소유하고 있던 토론토 필름 현상소의 지분을 매입합니다.


필름 현상소를 살려야 하는 난제에 맞닥뜨린 영은 DuArt를 차별화할 수 있는 업계의 다음 돌파구를 눈여겨보았습니다.

이 뛰어난 젊은 팀은 DuArt에 절실히 필요한 다음 사업 확장 단계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텔레비전, 특히 텔레비전 뉴스에서 미래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신속함을 중시하는 텔레비전 뉴스 제작 과정을 따라가기 위해 DuArt는 업계 선두의 짧은 네거티브 현상 및 건조 주기 기계를 활용할 새로운 방식을 강구했습니다.

뉴스에 비춰진 DuArt

1960년 영이 사망하면서 어윈은 이사회장, 코프먼은 사장이 되었습니다. 이후 스미스가 이사회에 이름을 올리고 부사장이 되었으며, 톰 살바토르(Tom Salvatore)는 현상소가 가장 아끼는 중역 기술자 대열에 올라서게 됩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영화 사업이, 나중에는 텔레비전 사업이 미국 서해안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새로운 난제가 등장했습니다.


어윈은 16mm 엑타크롬(Ektachrome)과 수입 아그파 게바크롬(Agfa Gevachrome) 프린트 필름을 사용해 16mm 리버설 오버나이트 데일리(reversal overnight dailies)를 업계에 도입하면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DuArt는 독창성으로 또다시 10년치 네트워크 뉴스 작업을 확보했고, 한편 산업 필름 시장 및 독립 제작의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자 DuArt는 영화 및 텔레비전 업계에 16mm와 35mm, 컬러와 흑백, 네거티브와 리버설 프로세스 총체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었고, 이에 현상소는 공간 확보가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DuArt는 모든 외부 운영을 처분해 처음 발을 내딛었던 웨스트 55번가의 옛 주차장 건물을 매입했습니다. DuArt는 이제 자신의 힘으로 우뚝 서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방향
발전의 10년

이후 십년 동안 필름과 비디오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DuArt의 전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1968년 리차드 마쿠스(Richard Markus)의 지도 하에 DuArt 비디오 후반제작 부서 롬벡스(Rombex)가 운영을 시작했습니다. 코닥의 컬러 영화 필름이 강화되는 것을 본 어윈은 Cinema Research Products 광학 프린터를 구매하여 DuArt 광학 프린팅 부서(DuArt Optical Printing Department)를 설립합니다. 네거티브 준비, 시간 맞춤, 색 조정을 위한 전산화된 프레임 수 및 삽입(cueing) 시스템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이 작업으로 DuArt는 1977년에 Technical Academy 상을 받았습니다.


DuArt는 자사만의 독특한 능력으로 최상 품질의 35mm 확대(blow-up)를 제공하며 독립영화 제작자들에게 제공하며 독립영화 제작의 본산지라는 입지를 강화했습니다.


오스카 상을 받은 바바라 코플(Barbara Kopple)의 다큐멘터리 ‘Harlan County U.S.A.’, 밥 영(Bob Young) 형제의 Cannes Camera d’Or 수상작 ‘Alambrista’, 존 세일즈(John Sayles)의 ‘The Return of the Secaucus Seven’부터 스파이크 리(Spike Lee), 수잔 세이델먼(Susan Seidelman), 로버트 알트만(Robert Altman), 에롤 모리스(Errol Morris)의 영화에 이르기까지 이 새로운 시장에서 나온 작품이 명성을 누리게 된 데에는 DuArt의 뛰어난 최상 품질의 16mm 확대 기술의 기여가 있었습니다.


DuArt만이 1980년대에 출시된 Super-16을 포함해 전 포맷 포괄 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영상 제작과 후반 제작의 부상을 내다본 DuArt는 필름-테이프 변환(film-to-tape) 서비스 업계를 이끌었습니다. DuArt는 미국에서 최초로 Rank Cintel Mark III 비점(flying-spot) 텔레시네 기계를 수입하면서 필름, 비디오, 오디오 완전 다각화 총 서비스 제공이라는 목표를 DuArt의 10층 건물 안에서 이뤘습니다.


1980년대 말에는 DuArt Video로 이름을 바꾼 롬벡스가 미국 동부 최대 규모의 텔레시네 시설이 되었습니다. 1992년에는 DuArt 현상소가 뉴욕 최대 규모의 현상소가 되었습니다.


업계의 새 선두자가 되면서 할 일이 많아지고, DuArt의 독창성에 기대게 된 독립영화 공동체의 수요도 커졌습니다. 아비드(Avid) 편집실을 설치하고 1992년 강력한 워크스테이션, 필름 레코더, 첫 Cineon Genesis Plus 스캐너를 고루 갖추어 DuArt Digital을 설립하는 등 1990년대에는 디지털 과정을 도입했습니다.


DuArt의 음향 부서는 1997년 완전히 탈바꿈하여 디지털 워크스테이션, 입체 사운드 기능, 필름과 비디오 동기화 모두 가능한 디지털 더빙기를 갖춘 최첨단 음향 믹싱 작업실을 마련했습니다.


필름 현상소에서 다년간 일한 핵심 베테랑 선배와 후배 비디오 부서와 함께 DuArt 필름 및 비디오(DuArt Film and Video)는 통합 서비스를 제공할 만반의 준비를 갖출 시설을 구축하고 있는 디지털 부서와 더불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습니다.


텔레시네의 부상
DuArt의 미래

DuArt는 최고 필름 현상소로 시작해 오늘날 고기술 미디어 서비스 제공업체로 성장했습니다. 린다 영(Linda Young) 회장/CEO의 지휘 하에 DuArt는 프로듀서, 배급사, 포츈 500 기업, 독립영화 제작자 등 다양한 고객군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며, 변함없이 고객의 니즈 부응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DuArt의 서비스는 글로벌 방송과 디지털 수익구조의 최신 동향에 부합합니다. 언어 현지화 제작, 디지털 자산 관리, 오디오북 제작, 4K 디지털 후반 제작 등 DuArt 미디어 서비스(DuArt Media Services)는 턴키(turnkey) 서비스 방식을 지향합니다.


컨텐츠 제작자 공동체와 지금까지 지원해 온 영화 제작자들에 대한 헌신을 이어가면서 지난 90년 동안 우리를 이끌어 온 열정으로 DuArt는 자사 역사의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DuArt가 이 유산을 이어가면서 최고의 미디어 서비스 업체로 더 멀리 더 높이 도약하는 것을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DuArt가 업계에서 선두 주자로 두각을 내세우면서 CBS News와 큰 사업을 하게 되었고, 뉴욕의 텔레비전 업계에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195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거대한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 시기에 DuArt는 오랫동안 이어온 영화제작 사업을 유지하는 한편 광고 작업과 초기 비디오-필름 변환 키네스코프로 사업 분야를 다각화했습니다.


Irwin Young

Irwin Young receiving the Academy Award for Technical Achievement (Oscar), 2000.